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우스햄튼 FC (문단 편집) === 창단부터 2012년까지 === [[풀럼 FC]]나 [[아스톤 빌라 FC]] 같이 [[성공회]] 교회 에서 창설한 팀으로, 1885년 세인트 메리즈 교회 청년부 학생들이 '세인트 메리즈 FC'로 창단했다. 기독교라는 구단 탄생 배경 때문에 별칭은 '성자'라는 의미의 '세인츠(Saints)'. 사우스햄튼을 줄여서 [[소튼]](So--uthamp--ton)이라고도 하기 때문에, 일종의 애칭 같이 편하게 소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. 창단 후 지역 곳곳을 전전하다 1897년 현 명칭으로 변경한 뒤, 1898년 '더 델'에 자리를 잡았다. 1920년 풋볼 리그 3부부터 가입 후 1921년 2부 리그 승격 후 31시즌 동안 2부에만 머물렀다. 다만 1952/53 시즌에는 골잡이 찰리 웨이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3부로 또다시 떨어졌다. 1955년 친정팀의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인 [[테드 베이츠]] 감독이 온 후 새 전기를 맞았다. 1962년에 연고지 출신 공격수 마틴 치버스를 영입한 후 1963년에 처음으로 FA컵 결승에 진출했고, 1966년에 팀 역사상 최초로 1부 리그로 승격하였다. 또 1968-69 시즌과 1970-71 시즌에 두 차례 당대 최고 기록인 리그 7위를 기록했고, 1969년에는 인터-시티 페어스컵에 출전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무대를 밟은 바 있다. 1973-74 시즌 도중에 18년 동안 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테드 베이츠 감독이 이사로 선임되자 [[로리 맥메네미]]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부임 첫 시즌인 1973-74 시즌에 20위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강등당했고, 다음 시즌인 1974-75 시즌에 2부 리그 소속으로 FA컵 결승전에 올라 후반 38분 바비 스톡스의 결승골로 [[맨체스터 유나이티드]]를 1-0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지었고, 이후 1977-78 시즌에 2위로 1부 리그에 승격했다. 1982년에 레전드급 수문장 [[피터 쉴튼]]을 영입한 뒤 1983-84 시즌에 당시 리그 최강팀이었던 [[리버풀 FC]]에 이어 2위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다. 2005년 강등 이전까지 무려 27년간을 최상위 리그에서 버텨 온 클럽이다. 당연히 1992~93 시즌 출범한 [[프리미어 리그]]의 원년 멤버이기도 하며, 1998/99 시즌에 17위로 잔류해 '위대한 잔류'로 불렸고, 2001년에 정든 '더 델'을 떠나 신축구장 '세인트 메리스 스타디움'으로 이전했다. 2002-03 시즌에는 초반에 좋은 경기를 펼쳤음에도 패배가 많아 [[고든 스트라칸]] 감독 경질설까지 나왔으나, 보드진의 신뢰를 받은 스트라칸 감독은 외국인 선수를 적극적으로 사들이고 특유의 용병술로 점차 저력을 발휘해 [[FA컵(잉글랜드)|FA컵]]을 준우승하며 UEFA컵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. 이 시즌에서 제임스 비티는 23골을 넣어 리그 득점랭킹 3위에 올랐다. 1990년대 중후반부터 위성이나 케이블로 유럽축구를 본 이들에겐 프리미어 리그의 단골 '올해의 골' 경쟁자였던 사우스햄튼의 전설 [[매튜 르 티시에]](Matthew Le Tissier)의 소속팀으로, 2002년 월드컵 이후부터 EPL을 접한 이들에겐 제임스 비티, [[웨인 브릿지]] , [[안데르스 스벤손]], 아구스틴 델가도, [[로리 델랍]] 등의 활약으로 친숙한 팀이며, [[코번트리 시티]]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초창기 생존왕 기질이 있던 대표적인 구단이었다. 그러나 2003년 오프시즌 때 레알 소시에다드로부터 하비에르 데 페드로를 사려다 그의 팀 잔류 의사로 무산됐고, 웨인 브릿지가 첼시로 이적하면서 전력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다. 같은 시기에 루퍼트 로 회장의 전횡도 심해져 2004/05 시즌 들어 감독이 세 번이나 바뀌고, [[케빈 필립스]]와 [[피터 크라우치]], 제임스 비티 등 주축 선수들이 줄부상으로 많이 나오지 못하는 등의 악재가 생겨 [[풋볼 리그 챔피언쉽|풋볼 리그 챔피언쉽(2부리그)]]로의 강등이라는 쓴 잔을 마셨다. 불과 한 시즌 전에도 [[UEFA 컵]]에 참여하던 팀으로서는 참혹한 결과였다. 해당 시즌은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유일한 '''최종 라운드 전까지 강등 확정팀이 정해지지 않은''' 시즌이었을 정도로 강등권 싸움이 치열하였는데, 최종전에서 [[맨유]]를 맞아 선제골을 넣었지만 1-2로 역전패당하며 최종 순위 20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만 것이다. 여담으로 이 시즌 강등권 전쟁의 최종 승자는 [[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]]이었는데, 최종전에서 웨스트 브롬에게 패배한 [[포츠머스 FC]]의 팬들은 그들의 패배보다 '''그들의 원쑤 사우스햄튼의 강등을 도왔다는 것에 감격'''해하며 경기종료 후 웨스트 브롬 팬들과 함께 경기장에 난입해 축제를 즐겼다(...).[* 당시 사우스햄튼 감독은 [[해리 레드냅]]이었는데, 바로 이전에 포츠머스의 감독이었고 그 팀의 레전드 감독이었건만 구단주와의 불화로 감독직 그만 두고 맡은 게 하필 원수지간인 사우스햄튼이었다. 당연히 시즌 내내 포츠머스팬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막상 사우스햄튼이 강등당하자 포츠머스팬들은 기뻐했는데 이 당시 포츠머스 시내에 걸린 플랜카드에 이렇게 써있었다. '''"임무 완수를 축하하오. 레드냅 요원(...)"''' 그리고 05-06시즌 중반 레드냅감독은 다시 포츠머스로 돌아오는데 [[서포터]]들의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(...)] 강등 이후 의욕적인 투자로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노렸지만 번번히 무산되었고, 무리한 투자로 팀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. 결국 2009년 4월 재정난으로 승점 10점을 감점당하며 50년 만에 3부 리그인 [[풋볼 리그 1]]으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다. 선수들의 급료마저 체납되어 법정관리가 선고되기 직전이었던 2009년 7월, 세계적인 중장비 재벌 '립헬'사의 소유주 마르쿠스 립헤르(Markus Liebherr)가 팀을 사들이며 팀은 빠르게 정상화된다. 현재까지도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는 [[리키 램버트]], [[조세 폰테]], 그리고 [[나이젤 앳킨스]] 감독 등이 3부 리그에서 활약하던 이 시기에 영입되었다. 립헤르는 팀 인수 후 1년만인 2010년 8월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했지만, 생전에 립헤르가 구단 운영 체계를 잘 갖춰 둔 덕에 그가 설립한 재단과 그가 임명했던 구단주에 의해 현재까지도 팀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다. 립헤르의 사후 사우스햄튼은 풋볼 리그 트로피와 두 번의 승격을 경험하였으며, 선수단은 립헤르의 영정에 그들의 승리를 헌정하였다. 2012년부터 팀은 립헤르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'마르쿠스 립헤르 메모리얼 컵'을 프리시즌 친선 대회로 개최하고 있으며, [[아스날 FC]]가 초대 우승자가 되었다. 2009년 7월 [[앨런 파듀]]가 사우스햄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.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업가 니콜라 코르테세를 데려와 립헤르를 대신하여 사우스햄튼 구단주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. 이 시기 [[리키 램버트]]가 [[브리스톨 로버스]]에서 영입되었다. 2009-10시즌 3부리그에서 재정문제로 승점 10점이 감점된 채 시작했지만 아깝게도 플레이오프 진출권과 승점 7점차로 시즌을 7위로 마쳤다. 2010-11시즌 개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앨런 파듀 감독이 갑작스럽게 전격 경질되었다. 파듀의 후임으로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나이젤 앳킨스가 새 감독이 되었다. 사우스햄튼은 3부리그에서 브라이튼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2부리그로 승격하였다. 그리고 2011-12시즌 3부리그에서 승격하자마자 2부리그에서 레딩에 이어 2위로 백투백 승격에 성공, 7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에 복귀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